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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광장] 인생의 겨울과 ‘소망의 봄’
10월 초순 강원도 한 산골에서 필자의 환갑기념으로 모인 중고교 동아리 친구(부부)들과 필자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필자 제공]

최근 중·고교 시절 동아리 친구(부부)들과 조촐한 환갑기념 모임을 가졌다.

다들 말투나 행동은 그때 그대로였지만 얼굴과 몸에 드리운 세월의 흔적만큼은 어쩔 수 없다.

며칠 전 필자 가족이 사는 홍천 산골에는 연이틀 아침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된서리와 싸락눈이 내렸다. 겨울도 머지않았다.

인생의 환갑은 사계절로 보자면 겨울의 문턱쯤 아닐까? 100세 시대 운운하지만 큰 질병이나 장애 없이 살 수 있는 건강수명은 80세에도 크게 못 미치니 말이다.

유소년 시절 필자는 강원도 산골에서 살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산과 강, 하늘이 반갑게 인사했다. 자연이 곧 친구였다.

산골의 여름밤에는 동네 아낙들이 누구 할 것 없이 빨랫감을 가지고 강가에 모였다. 한바탕 수다도 떨면서 고된 농사일에 땀범벅이 된 몸을 씻고 빨래를 했다. 대개는 어린 자녀도 함께 데려와 몸을 씻겼다. 4남2녀 중 막내였던 어린 필자도 가끔 그 자리에 있었다.

유난히 캄캄했던 어느 날 밤, 엄마의 눈에서 잠깐 벗어난 어린 필자는 재미있는 놀거리를 찾아 얕은 강물로 들어갔다. 흐르는 물에 몸을 맡겨 살짝 떠내려가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몸 전체가 마치 강바닥이 꺼진 것처럼 물속으로 쑥 빨려들어 갔다. 물살까지 빨라져 몸은 중심을 잃고 떠밀려 내려갔다. 어린 나이에도 본능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살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 절망으로 끝날 즈음 손바닥에 뭔가 닿았다.

순간 놓칠세라 꽉 움켜잡았다. 그것은 강물에 드리워져 있던 능수버들 가지였다. 때마침 버둥거리던 발바닥에도 물속에 잠겨 있던 바위 끝이 걸렸다. 발로 바위를 딛고 손으로 능수버들 가지를 잡아당겨 간신히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오직 필자만 아는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첫 경험이었다.

30대 직장 시절까지 필자는 산과 강에서 여섯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뇌리에 각인된 것만 그렇다.

한 번은 직장 산악회를 따라 먼 곳으로 무박이틀 산행에 나섰다. 목적지인 정상을 찍고 능선을 따라 하산하던 중 내리막 갈림길에서 갑자기 옆 봉우리도 정복하고픈 욕심이 발동했다.

혼자만 올랐는데 생각보다 경사가 훨씬 가파르고 지그재그(Z) 산길이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번에는 만용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하산시간 단축을 위해 길을 무시한 채 그냥 직선으로 내려갔다.

그 과정에서 2m가 넘는 암벽 밑 좁은 공간으로 살짝 뛰어내렸는데, 아뿔싸!! 그 아래는 더는 내려갈 수 없는 낭떠러지였다. 설상가상 다시 올라가려고 해도 암벽에는 손으로 잡을 만한 것도, 발을 디딜 만한 틈도 없었다.

그야말로 고립무원, 진퇴양난의 순간 생전 처음으로 ‘제발 한 번만 살려 달라’고 신께 기도했다. 두려운 마음을 다잡고는 최대한 두 손을 뻗어 뛰어내린 곳 위쪽에 있는 잡초더미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손으로 잡초를 힘껏 잡아당기는 동시에 발 구르기를 해서 상체를 간신히 암벽 위쪽에 걸쳤다.

그 순간 진달래나무의 밑동이 눈에 확 들어왔다. 오 마이 갓!! 재빨리 한손을 뻗어 밑동을 잡고선 필사적으로 몸을 끌어올려 탈출에 성공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기도도 하고 보이지 않는 구원의 손길도 느꼈지만 감사하는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직장과 일에 매여 있던 40대 때는 업무와 인간관계 스트레스, 과음·과로 등 무절제한 생활로 인해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 급기야 하혈과 가슴통증을 겪으면서 ‘이러다가 갑자기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옥죄어 왔다.

이때의 위기는 병원이 아니라 아내의 시골살이 제안과 준비 그리고 이어진 귀농이라는 대반전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

어느덧 14년째인 시골생활에서는 딱 한 번 생사의 갈림길에 섰었다.

2015년 6월의 어느 날, 초장거리 귀농·귀촌 강의를 위해 차를 몰고 가던 중 고속도로에서 날벼락 같은 삼중 추돌 사고를 당했다. 차는 만신창이가 됐지만 천만다행으로 필자와 아내는 터럭 하나 다치지 않았다(당시 아내는 교대 운전을 위해 동승했다). 보이지 않는 구원의 손길이 있었다고 믿는다.

지금까지 맞닥뜨린 여덟 번의 죽을 고비 가운데 절반은 부모도, 아내도 모르고 오직 필자만 안다. 물론 하늘은 모두 알고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지난 60년 동안 이렇게 온전하게 지내온 것은 모두 신의 은혜다. 산에서나, 물에서나, 직장생활 때나 심지어 운전 중일 때도 보이지 않는 신의 손길은 언제나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덟 번의 죽을 고비를 하나씩 넘기면서 점점 확실하게 깨달았다.

자연의 계절은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온다. 그래서 겨울은 인고의 계절이자 희망의 계절이기도 하다.

환갑 이후 인생의 겨울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돈과 명예, 권력을 더 채우려고 욕심과 만용을 부릴 게 아니라 나를 비우고 늘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인생의 겨울이 끝이 아닌 새로운 ‘소망의 봄’을 준비하면서....

박인호 전원칼럼니스트

hwshi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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