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이 제주포럼 후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부진을 겪는 반도체 업황과 관련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기업 경쟁력 자체에 개입하는 일들이 생겼다”며 “이제는 정부 플러스 기업의 경쟁 형태”라고 했다. 반도체 업황이 미-중 패권 경쟁과 공급망 주도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기업 홀로 감당하기에는 힘에 부친다는 얘기이다. 그가 “기업 경쟁력을 키워야 하겠지만 이제는 밖에 나가서 저희(기업)만으로 이길 수 없는 상태”라며 “정부와 민간이 ‘원팀’이 돼서 활동해야 하는 문제”라고 부연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자유무역과 세계의 공장인 중국의 굴기를 타고 ‘G10(주요 10국)’국가로 도약했다. 한 마디로 세계화의 물결에 올라타 무역강국의 입지를 다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물줄기가 대선회하는 시점이다. 미-중 패권경쟁이 상징하듯 세계는 자유 진영과 권위주의 세계로 급격히 분리되면서 세계화는 퇴조하고 블록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갈등의 배경에는 반도체가 자리 잡고 있다. 반도체는 첨단 산업의 쌀이자 국가안보를 좌우하는 핵심 기반기술이다. 중국이 반도체 굴기까지 성공하면 세계 최강의 입지가 흔들린다는 위기감에 미국이 한사코 이를 막아서고 있다. 경제에 외교·안보까지 더해지니 기업으로서는 셈법이 더 어려워졌다. 우리로선 동맹인 미국편에 설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그럴수록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 불편해지는 상황이다.
미국은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인플레감축법(IRA) 등의 당근과 채찍으로 미국 투자를 종용하고 중국에는 첨단 장비와 공정의 진입을 막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우리 메모리 수출의 40%를 차지하는 시장이다.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의 40%, SK하이닉스는 D램 40%와 낸드 20%를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다. 투자금액만 각각 30조원이 넘는다. 최 회장이 “중국이란 큰 시장을 포기하면 우리에겐 회복력이 없다”고 할 정도다. 프랑스와 독일은 미국과 연대하면서도 중국과의 디커플링(탈동조)에는 유연성을 보이며 항공기 대량 수출 등 경제적 실리를 취하고 있다. 미국도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잇달아 중국을 방문하면서 ‘디커플링 아닌 디리스킹(위험 완화)’을 강조하고 있는 점을 잘 살펴야 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탈세계화의 흐름은 우리에게 ‘양날의 칼’이다. 자유 진영과의 가치연대로 4차 산업 제조업 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기회다. 그러나 자원강국이자 거대 시장인 중국과 호혜적 관계를 유지하며 의존도를 줄여나가는 것은 만만찮은 과제다. 정부와 기업이 팀코리아로 뭉쳐 난제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