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미국 대선에서 개표기 조작 가능성을 보도한 폭스사(社)가 투·개표기 제조업체에 1조원 넘게 돈을 물어주게 됐다. 언론·출판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 헌법 1조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해온 미국에서 이런 거액의 배상이 나온 건 이례적이다. 표현의 자유가 아무런 한계 없이 보장되는 건 아니라는 상징적 사건이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투·개표기 제조업체 도미니언보팅시스템이 폭스뉴스(폭스가 운영하는 뉴스채널)를 상대로 자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델라웨어주 법원에 제기한 16억달러의 손해배상에서 양측은 폭스가 7억8750만달러(약 1조391억원)를 배상하는 것으로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지난해 폭스 매출의 5%에 달하는 거액으로, 미국 명예훼손 소송에서 공개된 합의금 중 가장 큰 금액이라고 한다. 가짜 뉴스에 대한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 사회 기준을 세운 것이다.
이번 소송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공화당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승리, 대선이 끝난 상황에서 폭스뉴스의 ‘투표 조작’ 보도에서 비롯됐다. 폭스뉴스가 “도미니언이 바이든의 당선을 위해 투표 결과를 조작했을 수 있다” “표를 뒤집거나 존재하지 않는 표를 추가하는 사기가 발생했다”는 식으로 근거나 증거 없이 반복적으로 보도한 것이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트럼프 지지층 사이에서 음모론이 확산돼 마침내 사상 초유의 미 국회의사당 난입 사건으로 이어졌다.
악의를 갖고 퍼뜨리는 가짜 뉴스와 표현의 자유의 경계를 명확히 한 이번 배상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 있지도 않은 허위 사실을 퍼트리고 표현의 자유와 면책 특권 뒤에 숨는 일이 자주 벌어지면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는 게 현실이다. ‘천공 국정 개입설’이나 ‘청담동 술자리 사건’ 등이 거짓으로 밝혀졌는데도 아니면 말고 식이 반복된다. 사실관계를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허위임을 알면서도 퍼트리는 행위에 엄정한 법적 조치가 따르지 않으니 가짜 뉴스로 이익을 얻는 쪽이 판을 치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4·19혁명 기념사에서 “지금 세계는 허위 선동, 가짜 뉴스, 협박, 폭력 선동, 이런 것들이 진실과 자유로운 여론 형성에 기반해야 하는 민주적 의사결정 시스템을 왜곡하고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한 이유다.
가짜 뉴스는 사실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조차 의혹의 불씨를 심어 사회 전체를 불신의 늪에 빠트린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말과 정책이 먹히지 않아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다. 가짜 뉴스의 피해자는 국민 모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