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여당이 전기요금 인상시기와 폭을 고심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전력의 회사채 발행 잔액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뜩이나 미국발 은행위기 여파로 불안감이 고조되며 우량 회사채에만 돈이 몰리는 상황에서 올해도 한전채가 시중 투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크다. 일반 회사채로 가야 할 자금까지 한전채로 쏠려 기업들이 자금 조달에 애를 먹었던 지난해와 같은 현상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전채 잔액은 올해 3월 말 기준 68조300억원으로, 지난해 동기(39조6200억원) 대비 무려 71.7% 증가했다. 지난해는 1분기에 6조8700억원을 신규 발행한 반면 올해는 같은 기간 벌써 8조100억원의 채권이 발행됐다. 원가의 70%에 못 미치는 낮은 가격에 전기를 팔면서 적자가 쌓이자 부족해진 현금을 메우기 위해 회사채 발행을 늘린 결과다. 이 추세라면 이달 중 발행액이 10조원을 넘어설 가능성이 크다. 공급이 늘면서 발행금리도 높아졌다. 지난해 한때 연 6% 코앞까지 치솟은 발행금리(2년만기 기준)는 연초 유동성의 힘으로 연 3.5%로 하락했다. 하지만 글로벌 채권시장 불안 등이 겹치면서 지난 4일 다시 연 3.99% 수준으로 높아졌다.
문제는 정부가 보증하는 우량 채권인 한전채가 일반 회사채로 가야 할 자금을 빨아들이는 ‘구축효과’다. 한전채로 시장 자금이 몰리면 비우량 회사채는 물론이고 우량 회사채까지 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수 있다. 실제로 신용 A등급의 GS엔텍은 700억원 모집에 120억원의 주문만 들어와 발행 목표액을 채우지 못했다. 신세계건설, 효성화학 등도 대거 미달이 발행했다. 이에 기업들은 CP(기업어음)로 눈을 돌리고 있다. CP는 만기가 짧아 유동성이 악화할 우려가 있다.
지난해 하반기 벌어진 레고랜드와 한전채발(發) 자금경색의 재연을 막으려면 한전의 적자를 줄이기 위한 전기요금 정상화와 한전 구조조정이 시급하다. 두부(전기)가 콩(연료)보다 싼 가격에 비유되는 비정상적 전기요금으로 작년 한전 적자는 32조원을 기록했다. 올 1분기도 5조원대 적자라고 한다. 2분기 전기요금 인상이 잠정 보류되자 증권업계는 올해 한전 영업손실 전망치를 기존 8조6000억원에서 12조6000억원으로 높였다. 요금 정상화가 늦어질수록 한전발 자본시장 교란이 커지고 부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훗날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당정이 6일 국회에서 ‘전기·가스요금 민당정 간담회’를 여는 등 다각적 여론 청취에 나섰다. 단계적 요금 인상으로 물가에 주는 충격을 줄이면서 전기 과소비와 에너지 비효율을 고치는 쪽으로 정책의 균형점을 찾아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