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대한통운이 하도급인 대리점 택배기사 노동조합의 단체교섭 요구를 거부한 것은 부당노동행위에 해당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하도급 노조와의 교섭 의무를 두고 벌어진 소송에서 원청이 패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직 상급심 판단이 남아 있지만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한 이번 판결에 따라 다른 하도급 업체 노조들이 원도급 업체를 상대로 줄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커졌다. 앞서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도 대우조선, 현대제철, 롯데글로벌로지스 등이 하도급 노조와 교섭할 의무가 있다는 판단을 연이어 내놓은 바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12일 “CJ대한통운은 집배점 택배기사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며 “택배기사와 관계에서 노동조합법상 사용자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또 “복잡한 노무관계가 확산하는 상황에서 원사업주(하청업체)에만 단체교섭 의무를 부담시킬 경우 근로조건 개선과 근로자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근로3권은 온전히 보호받지 못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은 “사용자를 ‘근로자와 명시적·묵시적 근로계약을 맺은 자’로 한정한 기존 대법원 판례보다 그 범위를 더 넓게 해석한 것이다. 2021년 6월 중노위가 CJ대한통운이 택배노조에 대해 단체교섭 의무를 가진다고 판정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법원의 판결은 특수고용노동자나 플랫폼 종사자가 급격히 늘어난 산업계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는 하지만 택배업계는 물론 산업계 전반과 정치권에 주는 파장이 만만치 않다. 실제로 중노위가 택배노조의 원청 교섭권을 인정한 뒤 산업계에선 하도급 노조가 원청에 교섭을 요구하는 일이 잇따랐다. 현대중공업(1·2심 승소) 등 다수 업체는 지금 법적 다툼을 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대우조선해양 하도급 업체의 선박 생산라인 점거와 같은 극단적 투쟁 방식이 확산될 우려도 크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판결을 기화로 여당과 기업들이 극력 반대하는, 이른바 ‘노란봉투법(파업노동자에 대한 사측의 손해배상청구 제한)’에 원청의 사용자성을 명문화할 공산이 크다.
노동환경의 변화를 반영한 법 개정은 필요하지만 사용자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해 포괄적이고 모호한 개념으로 만들면 교섭 당사자를 둘러싼 쟁의와 파업, 법정 공방이 난무하는 등 산업계에 일대 혼란을 불러올 것이다. 원청이 협력사를 제치고 제3자인 하도급 노조와 교섭하게 되면 파견법 위반, 직고용 문제 등 새로운 쟁점이 불거질 수 있다. 해외에 ‘한국은 기업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인상도 심화시킬 수 있다. 노사와 정부, 정치권이 머리를 맞대고 시급히 ‘합리적 기준’을 도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