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 이래 최대의 경제위기라고 한다. 암울한 팬데믹 경제를 뒤로하고 새해가 밝았지만 올해도 비관적 진단과 전망이 우세하다. 각종 경제통계지표뿐 아니라 산업과 민생 현장의 목소리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경제위기 중에서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안전 문제’다. 굳이 이태원 참사를 말하지 않더라도 안전불감증에서 비롯된 안전사고가 하루가 멀다고 발생하고 있다. 초대형 뉴스들에 밀려 주목받지 못하는 안전사고들도 비일비재하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기본과 원칙보다는 ‘상황에 맞게’와 ‘능률 우선주의’에 익숙해져 있다. 지켜야 할 원칙과 법에 따른 매뉴얼을 목표달성의 걸림돌로 간주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사고 발생 가능성이 크지 않으니 원칙과 매뉴얼이라는 경제적 ‘비용’을 지불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합리적인 행동일까?
오래전 일이지만 일본 도호쿠(東北)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지나친 매뉴얼 집착’과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 제로’ 탓으로 돌리는 국내 언론 기사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안전과 재해 매뉴얼의 순기능을 무시했거나 아니면 무지에서 비롯된 시각이었을 것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매뉴얼대로 안전과 재난훈련을 생활화하지 않았다면 잦은 지진과 자연재해뿐 아니라 그에 따른 대형 사고들을 극복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지상 전철이 많은 일본, 특히 도쿄권엔 건널목이 정말 많다. 건널목마다 이중 삼중의 차단장치와 지킴이아저씨들이 봉사하고 있다. 그런데 종종 인신사고나 안전 문제로 전철이 급정거해 승객들이 쏠리거나 넘어져도 놀라기는커녕 침착한 모습에 필자가 되레 얼떨떨했던 경험이 있다. 한 번은 하차할 역에 거의 다다른 곳에서 전철이 10여분이나 멈췄는데 사유인즉슨 전방의 건널목 문제라고 했다. 차단기의 작동은 문제없는데 차단기에 부착된 경고등이 원칙대로 점멸하지 않았다는, 다소 어이없는 이유(라고 나중에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경우라면 어떠했을까? 아마 전차는 잠시 멈추었다 매뉴얼을 무시하고 역에 진입했을 것이고 건널목에서도 역무원의 수신호를 받으며 진행했을 수 있다. 차단기 경고등 고장은 그 후에 수리됨으로써 아무 탈이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상황 종료’되지는 않았을까. 빈번한 신호기 오류에도 적절한 조치 없이 운행하다 수백명이 다친 서울지하철 2호선 추돌 사고뿐 아니라 탈선 사고나 인신 사고 등 작금의 끊이지 않는 철도 안전사고들을 보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 안전에 관해서는 작은 부분에도 원칙을 지키는 일본의 사고와 행동방식이 ‘신속히’ ‘상황에 맞게 적당히’에 익숙한 우리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
불편하더라도 ‘원칙을 준수’하는 경우와 ‘상황 따라 적당히’하는 경우 중 어느 쪽이 사회와 국가적 관점에서 효율적일 것인가, 그래서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인가는 자명해 보인다. 눈앞의 비용 부담과 편리함의 유혹 때문에 혹은 이용자의 항변을 핑계로 ‘안전’이 위협받거나 무너지게 되면 그 경제적 부담은 배가돼 우리 모두에게로 되돌아오게 됨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종인 여의도연구원 경제정책2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