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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칼럼]기억은 잃어도 변함없는 것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어느 순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평소와 다른 언행으로 낯선 사람처럼 느껴진다면?

항상 하교시간에 맞춰 저녁상을 차려두고 기다려줄 줄 알았던 엄마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김치찌개 끓이는 방법을 몰라 허둥대고, 인자하고 자상하셨던 아빠가 작은 일에도 불같이 화를 내며 밤만 되면 집안을 배회하며 가족을 놀라게 하는 것도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안타까워하며 보듬어준다.

하지만 ‘치매’라는 병의 특성상 단계가 진행될수록 가족의 부담과 상처는 겹겹이 쌓여간다. 그렇다고 손 놓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치매는 조기 발견과 함께 적절한 약물치료와 주변의 도움이 더해지면 병의 진행속도를 늦출 수 있다. 치매는 크게 초기, 중기, 말기 등 세 단계로 나뉜다. ‘최근 기억의 감퇴’가 시작되는 초기 단계에는 사회생활이나 직업능력이 다소 상실되더라도 어느 정도 독립적인 생활은 영위할 수 있다. 비교적 사회적인 판단력은 통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에 이 시기에는 환자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주변환경과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제공할 수 있는 활동을 선정하는 것이 좋다. 평소 환자가 좋아하던 활동이나 즐겨하던 활동 위주로 제공하되 난이도와 활동 단계를 조절해 과제 완성을 통해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초기 단계에서 보였던 기억력 감퇴, 언어능력 등의 증상은 더욱 악화하고 대체로 사회적 판단에 장애가 생기기 시작하는 중기 단계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동작도 어려워지게 된다. 이때 집 안에서 사용하던 전화, 텔레비전 등 가전제품을 조작하지 못하거나 외출을 한 번 하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주로 집에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 위주로 선정한다. 보호자와 가족교육 또한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중기 단계의 치매 환자에게는 시각적 활동이 가장 바람직하므로 언어적 지시보다는 직접 시범을 보이거나 영상 혹은 그림 등의 시각적 자극을 활용하는 것이 좋으며 그 외에 감각자극활동을 적용하면 환자의 흥미유발은 물론 적극적인 참여도 끌어낼 수 있다.

대부분의 기억이 상실돼 집안 식구도 알아보지 못하고 한 가지 단어만 의미 없이 반복하게 되는 말기 단계에는 모든 지적 능력이 심하게 손상된다. 기본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거의 전적으로 주변의 도움에 의존하게 된다. 신체 움직임 또한 현저히 줄어들어 결국 침대에서만 생활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무엇보다 환자에게 편안함을 제공할 수 있는 활동을 선정하는 것이 좋다. 주로 환자의 움직임으로 활동이 진행되는 것보다는 수동적 움직임으로 최소한의 관절 움직임을 유도하고, 감각자극을 제시하더라도 다양한 감각을 주는 것보다 한 가지 자극을 여러 번 나눠 자주 입력해주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언어 기능의 상실이 두드러져 말을 하지 않게 되는데 의미 없는 발화가 있다 하더라도 청각적 자극을 제시해주는 것을 추천한다.

사랑하는 내 가족이 단순한 건망증을 넘어 치매 증상을 보인다고 해도 우리는 가족의 이름으로 최선을 다할 것임은 분명하다. 설사 내 이름을 잊더라도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함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또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찾으려 애쓰는 것이지 않을까. 가족 중에 치매 환자가 있다면 거창한 무엇보다 그 환자에게 적절한 활동과 관심을 주는 것이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치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은성 호남대 작업치료학과 교수

kwat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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