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장의 지각 끝에 성탄절을 목전에 두고 마무리된 내년도 정부예산안의 통과 과정은 그야말로 참담하다. 638조7000억원으로 확정된 2023년도 예산안에서 눈길이 가는 것은 애초 정부 안보다 3142억원 줄었다는 점뿐이다. 미미한 감액 규모를 따질 일은 아니다. 총지출 규모가 국회 심사 과정에서 순감으로 전환한 것은 2020년도 예산안 이후 3년 만이다.
하지만 그 조차도 의미를 잃었다. 건전재정을 의식했거나 성실한 심사로 불요불급한 항목을 없앤 결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속기록은커녕 무엇하나 제대로 공개된 게 없이 진행된 ‘깜깜이’ 심사 과정은 물론이고 여야 의원들의 지역구 민원성 ‘짬짜미’ 예산까지 낯부끄럽지 않은 게 없다. 본연의 임무를 다해야 할 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제쳐놓고 원내대표협의체가 주고받기식으로 타결한 결과이니 애초부터 기대난망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해도 너무한 국회다.
깜깜이와 짬짜미 예산 폐해가 커질수록 더 아쉬워지는 건 물 건너 간 재정준칙이다. 정부가 재정 건전성 유지 방안으로 재정준칙을 만들기로 한 게 지난 9월이다. 예산 편성 때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비율을 3.0% 이내로 관리하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60%를 초과할 때는 2.0% 이내로 조이도록 한다는 게 골자다. 그런 내용을 담은 국가재정법 개정안이 여당 발의로 국회에 제출된 것도 이때다. 하지만 상임위원회인 기재위 안건으로 상정된 건 두 달도 더 넘긴 이달 1일이고 그나마 소위원회 단계에서의 논의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안 했다고 보는 게 옳다. 당연히 정기국회에서 입법을 완료하고 2024년 예산안부터 곧바로 적용하겠다는 정부의 목표는 물거품이 됐다. 이젠 일러도 내년 임시국회인데 이전투구에만 몰두하는 국회 상황으로 볼 때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현재의 골격보다 느슨한 문재인 정부의 재정준칙마저도 흘려보낸 국회의원들 아닌가.
내년 우리나라의 국가채무는 1134조원을 넘어선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도 50%를 돌파한다. 코로나 추경의 특수 상황 때문이라지만 방만재정의 면죄부가 되는 건 아니다. 감축 노력이 절실하지만 퍼주기 포퓰리즘은 고개를 숙일 줄 모른다. 법률로 상한을 막는 수밖에 없다. 그게 없는 나라는 OECD 국가 중에 우리와 튀르키예뿐이다.
물론 제대로 만들어진 재정준칙이라도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지난 2010년 국가부도를 맞은 그리스에도 재정준칙은 멀쩡했다. 결국 얼마나 제대로 준수하느냐가 관건이다. 하물며 준칙조차 없이 어떻게 재정건전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