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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아의 현장에서] 홈쇼핑에 뜬 에르메스

“경기가 심상치 않아요. 얼마 전엔 14년 된 거래처 부도 소식까지 들었어요. 내년엔 지금보다 분명 더 힘들 겁니다.”

한 해 매출이 2000억원에 이르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운영하는 업체 대표가 최근 기자를 만나 털어놓은 하소연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기간에 오히려 성장을 한 이 기업은 올 연매출이 5% 역성장 기조로 들어섰다고 했다. 고물가·고금리 여파로 소비자들의 지갑이 굳게 닫히기 시작한 4분기부터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았다는 설명이다.

다만 고물가·고금리 시대에도 ‘가심비(價心比·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감)’를 찾는 소비패턴만큼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한 번도 안 쓴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쓴 사람은 없어요.” 니치향수시장을 강타한 무화과향으로 만든 고급 샴푸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20대 후반인 사촌동생의 말이다. 500㎖ 병당 5만원을 웃도는 비싼 가격에도 그는 격월로 이 샴푸를 구입하고 있다. “그만둘 수 없는 나만의 취향”이라고 귀띔까지 했다.

이렇다 보니 연말부터 눈에 띄는 현상이 더욱 강력해진 ‘스몰 럭셔리(작은 사치)’ 현상이다. 실제로 명품 브랜드도 이 같은 분위기에 발맞춰 소비자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가질 수 있는 가격대의 상품을 빠르게 내놓고 있다. 희소성 있는 명품 브랜드 이미지를 위해 오프라인 매장이 아닌 온라인 전용 상품으로 만들어 판매한다는 것도 특징이다. 대표적인 예가 3만원대 명품 립스틱, 5만원대 명품 향수나 브랜드 로고가 대문짝만 하게 박힌 모자, 10만원대 명품 머플러, 30만원대 명품 커피잔 세트, 50만원대 명품 카드지갑 등이다.

실제로 9일 CJ온스타일은 홈쇼핑업계 처음으로 에르메스 식기를 판매했다. 명품 톱티어로 꼽히는 에르메스가 대중 판매 전략을 구사하는 TV홈쇼핑에 등장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날 무이자 12개월로 판매된 60만원대 에르메스 테이블웨어는 20분 만에 완판됐다. 이 테이블웨어는 고물가에 1000만원대 에르메스백 대신 향유할 수 있는 ‘나만의 에르메스’가 된 셈이다. CJ올리브영도 명품 화장품인 에스티로더 에센스 ‘갈색병’ 상품 용량을 무려 7㎖까지 줄인 2만원대 제품을 연말 기획상품으로 내놨는데 연일 일시 품절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현재 카카오톡 선물하기에도 조말론런던 핸드크림, 생로랑 카드지갑, 버버리 머플러 등이 판매 인기 순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고물가에 가계 부담이 커졌지만 그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소비자의 명품에 대한 욕망은 앞으로 소비지형을 어떻게 바꿀까. 당장 신세계인터내셔날은 내년 1월 1일부터 스몰 럭셔리의 대표 주자인 수입화장품사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샤넬도 올해부터 마케팅 무게추를 ‘온라인 채널 강화’에 두기로 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20~30대 비중이 특히 높은 온라인 플랫폼이 공식 브랜드관을 강화하며 물밑서도 힘을 더욱 키우는 배경과도 무관치 않다.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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