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초 국내 주요 경제지 입사 3년차에 외신부로 발령을 받았다. 인터넷, 스마트폰은 물론 노트북도 없던 시절이다. 기자들은 AP, 로이터 등 해외 통신사에서 밤새 쏟아낸 영문 뉴스를 정리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일본 소식은 다음날 국내 신문 1면 톱 기사로 자주 올라갔다. 그만큼 일본 기업과 경제·정치에 관심이 많던 ‘일본의 전성기’였다. 지금 되돌아보면, 당시가 일본 버블(거품) 경제 붕괴의 시작 초기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은 1960년대에 고도 경제성장기를 거쳐 경제부흥기에 진입했다. 국민소득은 1980년대 중반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섰다. 1995년에 4만5000달러를 넘어서기도 했다. 경제의 장기 침체 여파로 올해는 세계 33위까지 미끄러졌다. 2001년을 시작으로 몇 차례 일본에서 거주했고, 지금도 자주 일본에 가는 편이다. 처음 일본에서 살 때 동네 슈퍼나 쇼핑몰에 갔다가 발길을 돌린 적이 꽤 있다. 한국에 비해 물가가 워낙 비싸 지갑을 열기가 부담스러웠다. 지방 동네까지 들어선 공공 도서관과 체육시설, 공원을 보며 ‘선진국 일본’을 부러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일본에선 다른 선진국이 경험하지 못한 현상이 나타났다. 저성장과 초고령화의 동시 진행이다. 2010년 이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0~1% 정도다. 국민소득은 30년 전 수준인 4만달러로 되돌아갔다. 대졸 사원이 평생 벌어들이는 생애 임금은 전성기의 3억2410만엔에서 2억8780만엔으로 떨어졌다. 가구당 가처분 소득은 576만엔에서 463만엔으로 감소했다. 고령화율(인구에서 65세 이상 비율)은 지난해 29%를 넘어 선진국 가운데 가장 높다. 독일(22%), 프랑스(21%), 영국과 캐나다(19%), 한국과 미국(17%) 순이다. 소득은 계속 줄고, 노인 인구가 급증하다 보니 고령자의 빈곤과 케어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한국으로 눈을 돌려 보자. 우리나라는 지금 일본 판박이다. 근대화와 산업화의 출발은 일본보다 반 세기 이상 늦었다. 일본이 1910년께 시작한 중화학공업에 한국은 1960년대 후반에야 열을 올렸다. 국민소득은 일본처럼 세계 1위까지 올라가지 못했지만 3만달러 중반으로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 이달 초 한국의 평균 임금이 3만2532달러로, 일본(3만2503달러)을 앞선다는 조사 결과까지 나왔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2000년대 초반 5%에서 2020년 2%대에 이어 내년에 1%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고령화 진행 속도는 선진국 가운데 가장 빠르다. 오는 2045년께 고령화율이 37.0%에 달해 일본(36.7%)을 앞지른다. 게다가 합계출산율은 올 3분기에 0.79를 기록하며 세계 최저다. 미국(1.6명), 일본(1.3명)보다도 낮다. 인구는 2년 연속 줄고 있다.
온갖 난관을 뚫고 성장해온 대한민국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어떻게 저성장을 극복하고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를 풀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새해를 앞두고 ‘설렘’보다 ‘걱정’이 앞선다. 그때는 몰랐던 게 지금은 느껴지기 때문이다.
최인한 시사일본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