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우리 법의 기본적 규율에서 전적으로 벗어난 것으로서 앞서 본 판례의 태도에도 정면으로 반한다.”
“위와 같은 법률 효과는 우리 법이 예정하지 아니하는 민사적 제재를 새로 설정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는 착오자에게 취소권을 부여하는 우리 법의 결단에 현저히 어긋난다.”
대법원은 2014년 한 민사사건에서 2심 판결이 잘못됐다고 결론내며 판결문에 이같이 기재했다. 이례적으로 혹독한 표현이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낸 한 현직 부장판사는 “이 정도 표현은 연구관이 쓸 수 없다. 대법관이 직접 쓴 것”이라고 했다. 이 사건 주심은 민사법계 대가인 양창수 전 대법관이었다.
사안은 이렇다. 서울의 어느 택지분양권 매매계약이 해제됐다. 팔기로 했던 사람이 수분양자 명의를 변경해 원래 매수자가 분양을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연히 팔기로 했던 사람은 대금 전부를 돌려줘야 한다. 그런데 항소심은 매매대금 1억4500만원 중 5800만원만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사는 쪽에서 분양권 확보에 필요한 서류를 잘 관리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사유를 들었다.
한쪽에 과실이 있으면 그만큼 물어줄 돈을 깎는 ‘과실상계’는 손해배상에 적용된다. 하지만 계약이 해제된 경우 원상회복을 할 때는 이 법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민법 조문도 그렇고, 대법원 판례도 이미 나와 있다. 그런데도 항소심은 법적 근거 없이 매매대금의 60%를 깎았다. 대법원은 매도인이 부동산을 못 넘겨주는데 대금의 40%만 돌려주는 것은 “원래의 계약에서 의도된 경제적 효과를 훨씬 넘는 이득으로서 법이 허용할 것이 아니다”며 “사건 처리에 대한 감정적 지향”이라는 지적도 덧붙였다.
이렇게 ‘낙제점’을 받은 항소심 재판장은 현 대법원장인 김명수 부장판사였다. 처음으로 대법관을 거치지 않은 판사가 2017년 대법원장에 발탁되는 데는 ‘사법 농단’사태에 대한 반성이 명분으로 작용했다. 김 대법원장은 지명 직후 “재판만 한 사람의 수준을 보여주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대법원이나 일선 법원 판결이 이전보다 과연 나아졌는지 의문이다. 특히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거나 정책적 방향을 제시하는 판결이 드물었다. “대법원장도 소수 의견을 내겠다”고 공언했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법원의 정치적 중립성이나 독립성을 저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현직 판사가 청와대 법무비서관으로 들어가고,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냈다. 대법관 발탁 때도 대법원장이 과연 독립적으로 지명권을 행사했는지 의문인 인선이 이어졌다. 정치권에서 근거 없이 법원을 공격할 때 바람막이가 돼주는 일도 없었다. 지난 대선에서 후보들끼리 대장동 특혜 의혹 공방을 벌이면서 현직 대법관의 실명을 공개하는 바람에 그 대법관이 각종 서류를 떼오고 기자회견을 자청하는 초유의 일도 벌어졌다. 대법원장은 그저 침묵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대법관을 거치지 않은 판사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한 파격 발탁은 도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김 대법원장은 내년 7월 이전에도 대법관 지명권을 행사한다. 이분법적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실력을 우선하고 건전한 가치관을 겸비한 인사를 편견 없이 발탁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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