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남산四色] 슬기로운 갤러리 생활

2018년 11월 경기 여주 페럼클럽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시즌 최종전 ADT캡스 챔피언십. 당시 투어 최강자였던 ‘핫식스’ 이정은에게는 상금왕 2연패 여부가 결정되는 무대였다. 중요한 경기를 앞둔 그가 자신의 팬클럽 회장에게 뜻밖의 요청을 했다.

“오늘 성적에 내년 시즌 시드가 걸린 선수들이 있어요. 그 선수들 플레이에 방해되지 않게 저에 대한 응원을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주변의 미세한 소음에도 리듬이 깨지고 루틴이 흔들리는 게 골프다. 상금 10만~20만원 차이로 이듬해 ‘직장’을 잃을 수도 있는 선수들에겐 더욱 그럴 것이다.

코로나19로 3년간 굳게 닫혔던 국내 프로골프 투어의 문이 열리면서 대회마다 구름관중으로 북적인다. 팬들도, 선수들도 모두 신바람이 났다.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간판 박상현은 개막전 우승을 확정짓는 짜릿한 버디퍼트를 성공시키고 과하다 싶은 세리머니를 한 뒤 “갤러리에게 보는 재미를 드리고 싶어 일부러 좀 오버했다”고 웃었다. KLPGA 투어 스타 조아연은 3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나는 역시 갤러리가 필요한 선수”라며 팬들의 응원에 유쾌하게 화답했다.

하지만 반가운 갤러리의 귀환 뒤편엔 그림자도 있다. 최근 잇따라 불거지고 있는 갤러리 에티켓 논란이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일부 갤러리의 관전 매너가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는데, 몇 년 새 골프인구가 폭증하면서 관전문화는 오히려 더 후퇴했다는 지적이다.

지난주 KPGA 선수권 경기 중 올 시즌 상금랭킹 1위 김비오가 샷을 하려고 할 때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경기 흐름을 방해했다. 선수들이 어드레스한 후 카메라 촬영 소음이 나면 루틴이 깨지고 플레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지난달 KLPGA투어 두산 매치플레이에서는 모 선수가 일부 갤러리의 돌출 발언에 흔들려 경기에 패하고 심리 치료를 받는 일도 있었다.

KLPGA와 KPGA 협회 측은 최근 계속되는 갤러리 비매너 논란에 난감한 표정이다. 홀마다 경기 진행요원을 두고 갤러리가 선수들의 플레이를 방해하지 않도록 유도하지만 일부 팬의 돌발 행동이나 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칫 지나친 통제가 모처럼 대회장을 찾은 팬들의 발길을 돌리게 할 수도 있어 묘안을 고심 중이다.

특히 팬덤이 커진 여자 프로골프에선 특정 선수를 향한 과도한 응원 열기가 동반자의 플레이를 방해하는 모습이 심심지 않게 나오기도 한다. 이 때문에 일부 팬클럽에선 내부적으로 자정 노력과 응원문화 가이드를 제시하기도 한다. 다른 선수의 샷이 끝나기 전 이동을 자제하고, 선수들이 치기만 하면 무조건 “굿샷”을 외치는 것도 좋은 응원 방법이 아니라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 선수의 타구가 떨어지는 위치와 상황을 보고 그에 맞는 적절한 응원과 격려를 해 달라는 주문이다. 바른 갤러리 문화를 위해 KLPGA와 KPGA 협회가 한목소리로 통합 캠페인을 실시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다.

관중이 선수들을 따라다니며 응원하는 스포츠 종목은 흔치 않다. 구기 스포츠 가운데에선 골프가 유일하다. 그만큼 어느 스포츠보다 관중의 참여 의지가 뜨겁고 선수와의 호흡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대한민국 골프 선수들의 월등한 국제 경쟁력,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의 뜨거운 골프 열기만큼이나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 없는 수준 높은 골프 관전문화가 자리 잡기를 기대해본다.

anju1015@heraldcorp.com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