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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칼럼> 호주가 ‘신(新)백호주의’ 우려를 깨끗이 씻는 방법은
호주가 유색인종의 이민을 제한하는 ‘백호주의(白濠主義)’를 포기한지 내년이면 40년을 맞는다. 강산이 네 번 변하는 긴 세월이다. 하지만 호주에선 아직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엄연한 현실이고 인종증오 범죄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며칠 전 호주 브리즈번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또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올들어 3월 이후 네번째다. 중국인과 일본인들에 대해서도 “아시아의 개들”이라면서 무차별 테러를 가한다. 그런데 이를 엄하게 단속해야 할 경찰마저 인종차별성 발언을 해대고 적극적인 수사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직장 내 인종차별도 만연하고 있다. 호주 직장인 72%가 직장 내 유색인종 차별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30%는 실제 인종차별을 직접 겪었다는 조사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이처럼 시대착오적인 인종차별 및 인종범죄는 ‘신(新)백호주의’에 다름아니다. 최근 광산 붐이 급속히 식고 있는 가운데 고물가와 환율하락, 나빠진 경제상황, 일상화된 정리해고 등으로 호주의 반이민자 정서가 고조되는 분위기다. 국내사정이 나빠질수록 보수·우경화하는 다른 국가의 예를 봐도 이같은 사회현상은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1788년 영국정부가 빵을 훔친 좀도둑부터 정치범에 이르기까지 범죄자 이민선단을 호주에 보내면서 시작된 호주의 역사는 원주민 ‘애버리진’ 말살의 역사요, 백인우월주의의 역사였다. 뿌리깊은 백호주의는 1850년대 ‘골드러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엘도라도를 꿈꾸는 많은 유럽계 이민자들이 호주로 밀려들어오는 중국인을 견제하려고 지방정부 차원에서 백호주의를 내걸었고 1901년 호주 연방 결성과 함께 국가적 차원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유색인종의 유입을 제한하다보니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직면하자 1973년 백호주의를 폐지했다. 이로 인해 호주의 이민은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아시아계 인구는 크게 늘었다. 하지만 100년 넘게 이어져온 뿌리 깊은 인종차별 의식은 여전히 호주 사람들에게 남아있다. 호주 정부는 더이상 자국이 인종차별 국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만 호주에 거주하는 수많은 아시아계 이민자, 유학생, 주재원,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들이 느끼는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최근 알려진 일련의 사건은 그나마 피해가 심각하고 보도가 됐기에 공론화된 것으로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하지만 호주 정부는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뻔히 인종증오 행위로 의심되는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자국의 평판을 우려해 모른 척 하거나 심지어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려 한다. 때문에 인종차별 철폐를 위한 호주 정부의 노력에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1995년 특정 인종이나 출신국가를 비하하는 내용의 욕설이나 비방 등을 범법으로 규정한 ‘인종증오금지법(Racial Hatred Act)’을 제정했지만 유명무실하다. 인종차별금지위원장직까지 만들었지만 쇼였다.

호주 국민들의 유색인종에 대한 적대감은 호주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호주는 몇 년전만해도 아시아권 학생에게 매력적인 유학 및 어학연수 국가였다. 유학·관광산업은 호주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차지하는 3대 산업이다. 하지만 인종증오 범죄가 이슈가 됐던 2009년 63만여명을 정점으로 유학생수는 지속적인 하향세를 보여 올해 20% 이상 감소한 50여만명, 내년에는 48만여명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호주가 인종 증오 범죄가 만연하는 국가라는 이미지가 치명타가 된 것이다. 지난 10월 줄리아 길라드 호주 총리는 국가전략의 중심을 아시아로 옮기겠다는 의지를 담은 백서 ‘아시아의 세기에서의 호주’를 발표하면서 향후 10년간 호주가 이룩할 번영과 부는 빠르게 성장하는 아시아의 번영에 의해 부양될 것인 만큼,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시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자국내에서 계속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인종증오성범죄가 이어진다면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은 요원하다. 호주 정부는 말로만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게 아니라 이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할 때다.

김대우 국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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