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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 - 윤재섭> 은어와 비속어 시대 유감
X나 개짜증나. 디비 빨다 쌤
한테 걸려 X창 났잖아…. 후
미진 골목길에서 불량배들
입에서나 나올법한 욕설들
이 10대 여학생들의 입에서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현
장을 목격한 것은 실로 충격


언어와 사회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언어란 사회구성원들 간의 이해와 합의에 의해 완성되는 공유물인 까닭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언어학자들은 하나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언어를 연구해왔고, 언어는 그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유용한 수단이 돼왔다.

새삼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언어와 사회’란 주제를 들추는 이유는 요즘 들어 우리말이 전례 없이 난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10대 청소년들의 일부 언어는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다.

얼마 전 퇴근길 전철 안에서의 일이다. 교복에 가방을 둘러멘 여학생 서넛이 왁자지껄 소란스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맘때면 그럴 일이지’ 싶었다가 입이 딱 벌어졌다. 10대 여학생들의 입에 담기엔 너무도 거친 말들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X나 개짜증나. 디비 빨다 쌤한테 걸려 X창 났잖아. 안여돼 X바 쌤….”

무슨 얘긴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예절도 품위도 없는 이들의 말은 욕설이 분명해 보였다. 후미진 골목길에서, 또래 불량배들 입에서나 나올 법한 욕설들이 10대 여학생들의 입에서 분수처럼 쏟아져나오는 현장을 목격한 것은 실로 충격이었다.

10대 청소년들 사이에서 비속어와 은어는 이미 일상용어로 자리 잡고 있다. 국립국어원의 보고에 따르면 조사 대상 전국 초ㆍ중ㆍ고 학생 6053명 중 초등학생 응답자의 97%가 은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또 중ㆍ고등학생 응답자의 100%가 은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국적불명의 해괴한 은어와 비속어가 이미 청소년들의 일상이 돼버린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청소년들의 은어ㆍ비속어에는 사회에 대한 불만과 적개심, 분노가 적나라하게 녹아 있다는 데 있다. ‘무척’ ‘매우’란 의미의 ‘개’를 흔히 접두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게 가장 좋은 예다. 상대방을 비하하는 단어가 많다는 것도 특징이다. ‘덕후(오타쿠의 변형으로 만화나 게임 등에 빠진 사람을 비하)’ ‘현시창(현실은 시궁창ㆍ이상은 높은데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 경우)’ ‘안여돼(안경 쓰고 여드름 난 돼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사실 청소년들의 언어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기성세대의 책임이 없지 않다. 공부만 강요하면서 전쟁 같은 경쟁으로 내모는 부모, 인성교육이 부재한 교육시스템 속에서 은어와 비속어는 청소년들에게 있어 일종의 탈출구이자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일부 전문가들은 비속어는 자제돼야 하지만 은어의 경우 어른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고칠 것을 강요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은어 역시 한 세대의 문화이기 때문이란 지적이다. 기성세대가 오히려 청소년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가야만 소통의 장을 넓힐 수 있다고 꼬집는다. 은어와 비속어를 단순히 누구의 책임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개선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인 동시에 정신이다. 언어가 흐트러지고 난잡해지면 정신이 살아 있기를 기대할 수 없다. 광복 57주년을 맞는 15일을 기해 우리 선열들이 목숨처럼 지키고자 했던 우리말, 우리 언어를 다시금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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