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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획(一劃),획 하나에 담긴 작가의 온전한 예술세계
1.9m의 정사각 화폭을 상하로 이등분하며 검은 지평선이 조용히 드리워졌다. 간결하다. 그리고 모든 걸 품은 듯 장중하다. UC버클리와 예일대를 졸업하고, 뉴욕을 무대로 활동 중인 유명 조각가 리처드 세라(72)의 작품 ‘Handke’이다.

세라는 뽀얀 종이에 오일 스틱으로 선 하나를 그으며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곤 검은 스틱을 가로로 끝없이 그어가며 압도적인 검은 면을 완성했다. 가느다란 한 획에서 출발한 그림은 마침내 입체 같은 부피감을 드러내며, ‘끌어당김과 놓음’의 날 선 대립감을 선사한다.

청나라의 화가이자 이론가였던 석도(石濤)는 ‘일획론’에서 “한 획이란 존재의 샘이요, 모습의 뿌리”라고 설파했다. 한 획의 법을 세운 사람은 그 법으로써 모든 법을 꿰뚫는다고 역설한 것.

꼭 석도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한 획’은 모든 그림의 시작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림은 획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자신만의 고독한 작업실에서 획 하나하나의 의미를 제대로 구현하며 작업에 임할 때 그 그림은 비로소 작품이 되고, 격을 지니게 된다. 획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 마침내 그림의 이치도 터득하게 된다.


따라서 획을 긋는 ‘드로잉’은 마음을 갈고 닦는 수련이자, 지식과 생명에 대한 통찰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작품을 위한 본(本)이기도 하고, 본인의 역량을 시험하는 훈련이기도 하다. 아울러 매일의 사색을 기록한 ‘감성의 메모’이자, 온전한 작품이기도 하다.

국내외 작가 15명의 ‘한 획’을 긋는 드로잉 작업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고뇌와 작품에 대한 태도를 음미해보는 ‘한 획(一劃)’전이 6일부터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린다. 


전시에는 앤서니 곰리, 김태호, 김호득, 류샤오둥, 서용선, 리처드 세라, 유현경, 윤향란, 이우환, 정상화, 정현, 아니시 카푸어, 주세페 페노네, 샘 프란시스, 시몬 한타이의 드로잉과 회화 38점이 출품됐다. 이들은 자신만의 언어와 생각을 드러내는 방법을 찾기 위해 부단히 많은 획을 그리며 실험과 수련을 거듭해왔다.

작가들의 다양한 표현 방식만큼이나 드로잉에 임하는 태도 또한 각양각색이다. 김태호(서울여대 교수)는 “혹자는 드로잉을 완성된 작품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내겐 하나의 목적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젊은 작가 유현경은 “드로잉은 작가에 따라 해석이 제각각인데 회화를 하는 내 입장에선 드로잉은 그리기이고, 페인팅은 칠하기로 압축된다. 이번 작품들은 ‘그리기’ 실험을 한 것들”이라고 밝혔다.

조각가 정현은 “몸과 신경선으로 드로잉을 한다”며 “철판을 철근, 톱 등으로 긁어내거나 자동차에 매달고 달리면서 일부러 흠집을 낸 뒤 반년쯤 비바람을 맞게 해 녹으로 바뀌도록 했는데, 그 녹슨 선들은 결국 내 몸에서 나온 것”이라고 토로했다.


이 밖에도 잠시도 쉬지않고 뛰는 인간의 심장을 표현한 아니시 카푸어의 드로잉과 일상의 감흥을 마치 독백하듯 선으로 그어낸 윤향란의 드로잉, 몸 속의 기운을 강렬하고 거친 선으로 내리그으며 자신의 벌거벗은 초상을 완성한 서용선의 자화상도 나왔다.

결국 드로잉이란, 작가의 혼을 담은 하나하나의 획들을 통해 외로움, 고통, 좌절과 싸우고, 생의 기운과 작가정신을 치열하게 드러내는 ‘미술의 근간’임을 이번 학고재의 색다른 기획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8월 21일까지. (02)720-1524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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