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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해여행길..이상남의 ‘36m 매혹의 블랙홀’에 빠져보세요
쪽빛 남해 바다와 아치형 사천대교, 노란 단감으로 유명한 경남 사천(泗川). 그곳에 명물이 탄생했다. 비록 특정기업이 만든 연수원에 설치된 작품이지만 누구나 즐기고 감상할 수 있는 새로운 아트 프로젝트다. 뉴욕을 무대로 활동 중인 화가 이상남(Lee SangNam,58)이 막 설치를 끝낸 36m 길이의 초대형 회화 ‘풍경의 알고리듬’이 그것. 이 작품은 충무공의 발자취를 좇아, 또 남해의 푸른 섬과 바다를 순례하는 여행자라면 꼭 챙겨봐야 할 작품이다. 아니,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천리길 마다하고 사천을 찾을 이가 많을 듯하다.

이상남의 작품은 아늑한 광포만과 사천대교, 푸르른 대숲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경남 사천시 대진리 LIG손해보험(회장 구자준) 연수원에 설치됐다. 12만㎡(4만여평)의 너른 부지에 들어선 LIG 연수원의 교육관과 숙소를 잇는 투명 유리통로에 36m 길이의 곧게 뻗은 진홍빛 회화가 내걸린 것.

작품은 유리를 통해 바닥에도 천장에도 그리고 좌우 벽에도 투영되며 낮과 밤, 아침과 저녁으로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단 하나의 기둥도 없어 마치 공중부양하듯 허공에 붕뜬 40m 길이의 브리지는 ‘현대미술과 건축이 이룰 미감의 한 정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작품을 위해 2008년부터 뉴욕과 서울을 무수히 오간 이상남은 “언젠가 미국 화가 재스퍼 존스(80)의 ‘four seasons’을 보고 나도 회화로 사계절을 풀어내겠다고 생각했다”며 “그러나 내 작업은 인간이 창조한 형상이 출발점으로, 이를 자연과 완벽하게 합일시키고자 했다”고 밝혔다. 작품명은 사계절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바람-대나무-섬’으로 붙여졌다.

작가는 에너지가 넘치는 빨강및 검은색 바탕에 크레디트카드, 또는 윈도를 연상케 하는 흰 직사각 화면을 올리고, 자연을 함축한 알 듯 모를 듯한 기하학적 도형들을 아름답게 배치했다.

이상남은 이미 LIG손해보험 본사(서울 역삼동) 사옥의 아트프로젝트를 시행했으며, 작년 초에는 안산의 경기도미술관에 국내 최대 규모의 벽화(길이 46m)를 설치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경기도 미술관의 드넓은 벽을 감쌌던 작품이 ‘1㎜와의 전쟁’이었다면, 이번 프로젝트는 ‘5.5t 스틸과의 전쟁’이었다”며 “너도 나도 이미지를 추잉하는(씹는) 시대에 ‘매혹의 블랙홀’이 됐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그는 자신의 블랙홀을 위해 가로 2m, 세로 2.5m 크기의 150㎏짜리 철판 18개를 연결했다. 좌우 한 치 오차도 허용치 않고, 패널에 여러 겹의 물감을 올렸음에도 마치 한 번의 붓질로 마감한 듯 매끈하기 이를데 없는 작품은 투명한 유리큐브 속에서 찬란한 빛과 리듬감을 발하며 보는 이를 홀린다.

LIG는 이번 아트 브리지를 설계하며 이상남 작품만을 위한 공간으로 지원했다. 공중에 뜬 브리지는 건물과 건물을 잇는 공간이지만 항온·항습시설, 자외선 차단시설, 별도의 냉방설비를 설치해 미술관급 시설을 갖췄다. 따라서 유리 브리지는 ‘이상남의 매력적인 공중미술관’이 됐다.

“기업의 건축물에 미술품이 설치되는 건 지극히 흔한 일이지만 건축 이전 단계에서부터 예술가가 참여하는 미술관급 프로젝트로는 처음이다. 작품에 대한 배려가 매우 세심해 더 긴장됐다”며 “그림을 걸고 보니 꼭 벌거벗고 사거리에 서 있는 느낌”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완벽에 가까운 정교한 공정과 회화와 디자인의 경계를 교란하는 기하학적 형상의 반복적 배치를 통해 이상남은 서구 모더니티의 기하학적 추상미학을 역동성ㆍ순환성ㆍ비결정성 등의 동양적 개념으로 보란듯 시현해냈다.

작가는 “자연과 인공, 무위와 유위, 이러한 궁극적 이원성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내 아이콘의 구조(deep structure)는 직선과 원이다. 직선은 죽음이요, 원은 삶이다. 모든 시간은 직선과 원의 복합이다. 나의 예술은 직선과 원이 무화(無化)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며 “나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합리와 비합리,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샛길을 걷는다. 바람이 불면 영혼을 느끼듯 내 그림 또한 영혼을 불러내길 원한다”고 밝혔다.


단일작가의 기업 장식예술품으론 국내 최대 규모에, 가장 오랜 시간이 투입됐으며, 작품값과 제반설비 비용도 최고 수준을 기록한 이상남 작품이 걸린 LIG연수원은 지상 6층 지하 2층 규모의 건물에 공연 및 강연장으로 사용 가능한 800석 규모의 다목적홀, 커뮤니티 정원, 야외공연장, 게스트하우스를 함께 갖춘 복합문화센터로, 오는 9월 정식오픈한다.

▶이상남 작가는?=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1년부터 뉴욕에 거주하며 작업 중이다. 개인전은 ‘풍경의 알고리듬’ 경기도미술관 로비상단의 벽면설치(안산), 엘가 위머 PCC (뉴욕), PKM트리니티갤러리(서울), 갤러리 현대(서울), 갤러리 아페르(암스테르담), 더글라스 우델 갤러리(벤쿠버) 등에서 17회에 걸쳐 가졌다. 단체전으로는 ‘Younivers’(세비야비엔날레 안달루시아 현대미술센터, 세비야), ‘Clear interntions;(로툰다 갤러리, 뉴욕), ’Dreams&reality’(인터내셔널 갤러리, 스미소니언재단, 워싱턴D.C.), ‘Korean Drawing Now’(브루클린미술관, 뉴욕),‘Dragon veins’(남플로리다대학 현대미술관, 탐파), 상파울루비엔날레(상파울루미술관, 상파울루) 등에 참여했다. 작품에 대한 비평은 ‘뉴욕타임즈’,‘아트 인 아메리카’, ‘아트포럼’, ‘프래쉬아트’ 등에 게재됐다. 사진촬영=김도윤,박상훈

사천=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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