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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학, 한국사회에 길을 제시하다
淸代 정치지침서 ‘맹자사설’

몽골 영웅서사시 ‘강가르’

日최초 여성산문 ‘가게로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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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문명의 고전 재해석





우리 사회 담론 중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인문학과 문명을 둘러싼 담화일 듯하다. 한동안 인문학의 위기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더니 최근에는 인문학 강좌가 백화점에까지 도입되는 등 열풍이다. 또 세계화의 모순이 드러나면서 터져나온 문명 충돌과 과거 서구 문명에의 편입에서 벗어난 주체적 길 찾기로서의 문명 논의도 활발하다.

이런 움직임의 중심에는 새 질서를 향한 변화의 욕구가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인간의 삶, 인간이 만들어낸 것, 그 길이 막혀 있거나 잘못됐을 때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인 인문학, 고전으로 돌아가는 건 오랜 전통이다.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항해 인간 중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르네상스시대의 인문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텍스트에 기댔다. 고전의 새로운 해석은 역사를 이끌어갈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가는 기초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의 학자들이 문명과 인문학, 고전이란 열쇠말을 들고 한국 인문학의 길 찾기에 나섰다. ‘문명의 허브, 한국 인문학의 새로운 구상’이란 주제로 다양한 문명의 정체성과 소통을 보여주는 고전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한국 사회가 당면한 근본적인 문제를 들여다보고자 한 것이다. 한길사 문명텍스트 총서는 23명의 학자들이 3년 동안 작업한 첫 성과다.

채택된 고전은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양의 고전은 물론 서양의 고전과 몽골, 아랍, 아프리카 등 주목받지 못했던 세계 여러 문명권의 고전들로, 번역과 주해에 초점을 맞췄다.

이번에 ‘문명텍스트’ 총서에 포함돼 출판된 책들은 좀 생소하다. 중국 청대 초 새로운 정치윤리를 제시하고자 한 황종희의 ‘맹자사설’, 독일 인문주의를 열었던 헤르더의 ‘새로운 역사철학’, 영국 내전 중에 경제적 평등과 종교적 박애를 주장한 제라드 윈스턴리의 ‘자유의 법 강령’ 등은 과거 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위한 소통의 노력으로 읽힌다. 조선 소혜왕후의 ‘내훈’과 일본 최초의 여성 산문 문학작품 ‘가게로 일기’, 남성 중심적 전통의 지리학을 비판하면서 대안적인 페미니즘 지리학을 모색하는 ‘페미니즘과 지리학’은 문명의 재해석에 징검다리를 제공한다. 몽골의 장편 영웅 서사시 ‘강가르’는 유목 문명의 독특한 구전문화를 알려주며 정주민과 유목민의 소통을 꾀한다.

고전 텍스트 가운데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책은 10세기 후반 일본 헤이안 시대의 일기문학으로 일본 최초의 여성 산문문학으로 불리는 ‘가게로 일기’다. 아들의 이름을 빌려 ‘미치쓰나의 어머니’로 불렸던 중류 귀족 출신의 한 여성이 뒷날 최고권력자가 되는 후지와라 가네이에와의 20년 결혼생활을 기록한 것이다. 미모와 문재를 갖춘 한 여성이 일부다처제 혼인제도 속에서 강한 자의식으로 고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전적인 문헌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학문적 노력이 바로 인문학이다. 인간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문헌, 각 문명권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텍스트가 고전이다. 그러므로 고전을 새롭게 해석할 때 인간을 새롭게 이해하며 문명의 길을 새롭게 열 수 있다” (‘문명의 안으로’ 중에서)

헤이안 시대의 결혼은 남성이 여성의 집을 사흘 밤 연속으로 찾아가 함께 밤을 보내고 사흘째 되는 날 밤 여성의 집에서 피로연을 열어야 정식 인정을 받았다. 이른 새벽 가네이에가 떠나며 와카(和歌)를 보낸다. ‘이른 새벽녘 헤어져 가는 길에 보이는 하늘/애달픈 이 내 마음 이슬로 되고 지고.’ 그런데 결혼이 정식으로 성립되려는 시점에 미치쓰나의 어머니는 ‘이슬과 같이 덧없이 사라져갈 당신 마음을/부질없게도 믿는 나는 뭐란 말인가’고 묻는다. 미치쓰나의 어머니는 일부다처제인 사회에서 남편을 기다리며 종속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기반을 자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 여인의 일기가 문명의 텍스트로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미숙 교수의 주해에 따르면 일본은 당의 쇠퇴와 더불어 894년 견당사를 폐지하고 905년 ‘고킨와카슈’라는 운문집을 천황의 명에 따라 가나 문자로 편찬함으로써 중국 문명으로부터 독립, 나름의 국풍문화를 형성해 나간다. 이 일기는 일본문명의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준다. 주류인 중국 문명과 비주류인 일본의 역학관계도 살필 수 있다 .

영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지리학자인 질리언 로즈의 ‘페미니즘과 지리학’은 지리학의 남성 중심주의를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한 도발적인 실험서다. 로즈는 여성이 지리학에서 배제되고 열등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17세기 이후 근대 과학주의의 성립으로 본다. 즉 근대성을 대표하는 이성과 합리성은 남성의 전유물로, 여성은 자연의 일부로 타자화되면서 이런 이분법적 구조는 근대 이후 지리학의 뿌리가 된다. 로즈의 독특한 해석 가운데 하나는 18세기 이후 영미권에서 발달한 풍경화 전통과 여성 누드화를 지리학의 경관독해와 연결시킨 점이다. 여성, 경관, 자연을 동일시하고 바라보는 남성적 응시 뒤에 감춰진 남성적 내적 분열을 간파한다. 신화 속의 여성 인물상, 풍경화, 자연경관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과 비이성적, 열등한 대상에게 유혹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남성의 마음이 혼재돼 있다는 얘기다.

18세기 독일 신인문주의를 이끈 헤르더의 ‘새로운 역사철학’도 ‘만들어진 신’ 이후로 뜨거운 신 논쟁에 새로운 눈을 열어준다.

헤르더는 성서의 기록을 허황되고 신빙성 없는 것으로 여기고, 인류의 과거 전체를 계몽되지 않은 미몽의 시대로 간주하는 계몽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한다. 마찬가지로 역사를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신의 계시의 영역으로 바라보는 신학적 입장에도 반대한다. 헤르더는 초월적 역사신학과 기계론적 역사철학이 지니는 각각의 한계를 동시에 극복하기 위해 신의 섭리를 초월적 계시가 아니라 역사 안에서 작용하는 내재적 법칙으로 파악하는 새로운 역사관을 제시한다. 독일 역사철학과 역사주의의 효시라는 특별한 역사적 의미 외에도 언어학 문학 문예비평 역사철학 인류학 미학 신학 등 광범위하게 걸친 인문학 연구의 전범으로서 갖는 의미 역시 작지 않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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