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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승영,영상과 빛에 담은 생(生)의 기억과 흔적
‘소통’과 ‘기억’을 테마로 다양한 미디어 설치작업과 공간특성적 작업을 펼쳐온 미디어 아티스트 김승영(48)이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비나미술관(관장 이명옥)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다.

‘WALK, Kim Seung Young’이라는 타이틀의 이번 전시에 작가는 삶의 여정에서 맞닥뜨린 경험과 기억들에서 파생된 갖가지 모티브를 영상과 빛, 사운드 설치작업에 담아냈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지하로부터 지상까지 곧게 뻗으며 설치된 거대한 스피커타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버려진 스피커 186개를 탑처럼 빈틈없이 쌓아올린 김승영의 역작 ‘타워(Tower)’다. 전세계에서 만들어진 모양도,크기도 다른 스피커로 7m 높이의 소리탑을 쌓기 위해 김승영은 지난 3년간 스피커 500여 개를 수집했다.

작품 ‘타워’ 속에 들어가면 새가 날갯짓하는 소리, 심장박동 소리, 바람소리 등 8개 채널에서 신비롭고 장엄한 음향이 울려퍼진다. 관객은 김승영이 만든 ‘소리의 깊은 우물’ 속에서 잠시 명상에 빠져들게 된다.

‘타워’는 작가가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지난 1999년 각국의 유망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뉴욕 PS1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작가는 언어의 장벽에 부딪히며 어려움을 겪었고, ‘언젠간 이 뼈저린 경험을 작업에 담아내리라’ 결심했다. 귀국 후 그는 바벨탑을 떠올렸고, 이번에 스피커를 탑처럼 높게 쌓아올린 작업을 통해 이를 실현했다. 또한 폐기처분된 사물(스피커)은 자연의 소리를 입고, 새로운 생명체로 거듭나게 했다.
‘소통’이라는 어찌 보면 진부한 주제를, 참신하면서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이 작업을 작가는 앞으로 세계 곳곳에서 펼쳐보이길 희망했다.

그동안 물, 낙엽, 이끼 같은 자연물에 첨단 미디어를 결합시켰던 김승영은 이번에도 낡은 의자, 폐허, 작가 주변의 평범한 이들의 이름 같은 ‘별 것 아닌 소재’를 통해 삶과 소통, 기억과 실재, 생명과 죽음, 꿈과 현실 같은 문제를 성찰하고 있다.


이를테면 지하의 너른 전시장에 붉은색 철제의자 하나를 덩그러니 가져다 놓은 작품 ‘의자’는 ‘웬 녹슨 의자람?’하고 갸웃거리게 한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앉아 보니 따뜻하다. 차갑게 보였던 낡은 의자에서 온기를 느끼는 순간, 관객의 마음은 스르르 무장해제된다. ‘우리의 일상은 더없이 고단하고 팍팍하지만 이렇듯 뜻밖의 곳에서 작은 불씨같은 희망을 만나다니..’하고 되뇌게 된다.
본래 의자는 시장통 상인들이 혹독한 겨울추위를 잊기 위해 물을 덥히며 앉았던 것으로, 휘황찬란해진 현대의 삶과 오버랩되며 삶과 시간의 궤적을 드러낸다.

온통 새파랗고, 둥글게 칠해진 미술관 2층의 한 방에선 맑은 뭉게구름이 나타났다가 스러지길 반복한다. 작가는 구름이 움직이는 소리를 채집해 스피커를 통해 함께 들려주고 있다. ‘생성과 소멸’이란 자연의 이치를 한편의 ‘영상 시(詩)’처럼 펼쳐낸 작업이다.


프랑스 동부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할 당시 만든 영상작업 또한 삶과 죽음이 궁극적으론 하나의 고리로 이어졌음을 이야기한다. 작가가 살던 동네 귀퉁이에서 목도한 죽은 새, 그 주변에서 막 피어나고 있는 이끼와 새싹을 섬세한 사운드(사운드작업 오윤석)와 함께 보여주는 작품 ‘Strasbourg’는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열쇳말은 소통과 흔적, 삶 같은 것들”이라며 “모두들 큰 걸 목표로 숨가쁘게 뛰지만 나는 작고 소소한 걸 이야기하고 싶다. 앞만 향해 달려가는 현대인들에게 ‘느린 호흡’을 하는 ‘쉼의 공간’을 만들어주고자 했다”고 밝혔다. 스러져가는 사물에 새로운 형태와 가치를 부여하고, 시간의 흔적을 역추적한 김승영의 이번 작업은 일상의 결들이 차분히 담겨지며 전시장을 새로운 성찰의 시공간으로 바꿔놓고 있다.

미술평론가 김영순 씨는 “김승영의 작품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찰나적 만남과 기다림, 망각과 기억 속에 위치한 살아있는 존재들의 의미를 생생하게 연출한다. 과거와 현재, 물질과 영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고정관념화된 경계를 허물고, 눈과 귀와 촉각과 후각의 감응기재가 온전히 작동하여 세계와 만나게 되는 희열을 제공한다. 그의 작품에 초대받은 관객은 물질과 물질의 찰나적 만남과 기다림, 미끄러짐 사이의 여백과 여운에서 존재들의 내밀하고 근원적 가치들과 대화하게 된다”고 평했다.

미술관 측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음향과 화면을 차분히 감상하도록 하기 위해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신고, 한번에 관람할 수 있는 인원도 제한하고 있다. 숨 막히는 일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느린 호흡으로 걸으며 작가가 들려주는 나지막한 소리에 귀기울여봄직한 전시다. 6월3일까지. 관람료 2000원. 02)736-4371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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