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한신 대지진의 학습효과도 사라져버렸다. 온통 불확실성만 높아지는 상황이다. 지난 11일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 한국 등 일부 국가에서 잠시 나타난 반사이익 기대감은 후쿠시마 원전의 연쇄폭발 소식으로 사라졌다. 일부 전망기관들은 이번 대지진의 경제피해 규모가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5%(27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신 대지진 때 경제피해 규모는 GDP의 2.5% 수준이었다.
▶한국-일본-중국경제는 순망치한=대지진 직후 피해복구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재난의 역설’을 얘기했던 국내 경제 전문가들은 대재앙의 후폭풍을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자 한국경제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멈췄다.
일본과 경쟁관계에 있는 한국경제에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일본-한국-중국 경제의 특수성상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우려로 바뀌고 있다. 피해복구가 장기화돼 핵심부품ㆍ소재 분야와 같이 일본이 독과점을 형성하고 있는 산업생산이 차질을 빚으면 이들 분야의 대일의존도가 높은 한국 등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경제산업성 통계에 따르면 액정용 부품과 반도체 제조용 부품 등 하이테크 부품소재 분야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최소 65%에서 최대 100%에 달한다. 일본의 핵심부품 소재가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주요국의 대일수입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60% 이상이다. 한국의 수출이 늘어날 수록 대일 무역적자가 커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일본으로부터 핵심부품 수입이 원활해야 수출도 잘된다는 얘기다.
일본 경제의 펀더맨털을 반영하는 엔화의 향방도 시간이 갈수록 가늠하기 어려지고 있다. 지난 11일 대지진 이후 달러화에 대한 엔화 환율은 일단 강세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피해복구를 위한 ‘와타나베 부인(해외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일본의 투자자)의 본국 환류와 보험회사 자금 등의 송환으로 엔화가 강세를 띌 것이라는 예측은 지난 1995년 한신 대지진 때의 ‘학습효과’다. 당시 엔화는 약 3개월 동안 20% 가량 평가절상됐다.
이번에도 과연 과거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까. 시장 전문가들도 갈피를 못잡고 있다. 우선 엔화의 본국 환류는 과거와 비슷하겠지만 일본 중앙은행의 긴급 유동성 지원 규모가 다르다. 1995년 한신 대진진 당시 시중에 2조엔을 풀었던 일본 중앙은행은 이번에는 23조엔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시장에 공급키로 결정했다. 16일 외환시장에서 달러화에 대한 엔화 환율은 약세를 보이고 있다.
이영원 HMC투자증권 연구위원은 “막대한 자금방출로 약세로 가려는 움직임도 있고, 본국 환류로 강세로 가려는 힘도 작용해 엔화의 향방을 점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며 “중장기적으로 보면 약세 흐름이 대세”라고 전망했다.
통화가치가 자국의 경제사정을 반영하는 지표라면 엔화는 약세로 흐르는 게 맞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엔화가치 상승으로 대 일본 경쟁력의 개선을 기대했던 한국경제의 긍정적 효과는 사라지게 된다.
▶일본정부 피해복구 여력 있나=일본정부에 대재앙의 복구여력이 있는지도 시장의 큰 관심거리다. GDP의 200%에 달하는 국가부채를 고려할 때 일본판 뉴딜을 추진할 재원조달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일본이 버틸 수 있는 것은 95%가 넘는 국채를 자국 국민 보유하고 있어 일본경제 전체가 흔들릴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국채의 추가발행을 소화할 여력이 없어 1조달러에 육박하는 미국 국채매각에 나설 경우 달러화 폭락→세계경제 장기불황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연결된다는 비관론도 만만찮다.
“일본에서 발생한 지진은 일본이 최악의 상황에서 발생했다”고 한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루비니 교수는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해 ‘닥터둠’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비관론자다.
대재앙이 덮치면 경제는 ‘탐욕과 공포’의 모습을 동시에 드러낸다. 16일 도쿄증시의 닛케이 평균주가는 오전 9시 6분 현재 전날보
다 303.18포인트(3.52%) 급등한 8,908.33을 보이고 있고, 한국증시에서 코스피 지수는 전날보다 27.76포인트 오른 1951.68로 장을 시작했다.
대재앙 속에서 희망만을 보려할 때는 탐욕을 억누르고, 절망이 지배할 때는 공포를 다스려야 한다. 이것이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경제주체들이 취해야 할 기본 자세라는 게 경제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조언이다.
<신창훈 기자 @1chun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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