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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주영을 다시 본다>누구도 넘보지 못할 ‘위대한’ 업적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업가로서 일군 업적은 상상을 불허한다. 6.25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 정 명예회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정 명예회장이 사업에 본격 발을 디디면서 세운 건설회사 ‘현대토건사’를 1962년 국내 도급순위 1위에 올려놓은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현대토건사를 모태로 하는 현대건설은 이후 베트남에서 흘린 젊은이들이 피를 대가로 받은 돈으로 시작된 경부고속도로를 성공적으로 완공하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지는 등 우리나라 산업화에 큰 공헌을 했다.

뿐만 아니다. 현대중공업을 세워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에 등극한 조선업의 발판을 마련했고, 모두가 무모하다고 이야기한 자동차 분야에 뛰어들어 오늘의 현대자동차그룹을 탄생시켰다. 첨단산업에 눈을 돌려 1983년 현대전자를 설립해 삼성전자와 함께 한국이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를 주도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도 정 명예회장의 공적으로 꼽힌다.

이 과정에서 나온 전설적인 에피소드도 적지 않다. 한겨울 부산 유엔군 묘지를 새파란 잔디로 덮어 달라는 제의에 낙동강가의 보리를 옮겨 심은 것을 비롯해 조선소도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선박 수주를 위해 500원짜리 지폐의 거북선을 내밀었던 일화는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다.

또 1984년 아산만 방조제 건설 당시 물살이 너무 빨라 마지막 둑을 잇지 못해 모두가 힘들어할 당시 폐유조선에 물을 가득 채운 상태로 침몰시켜 유속을 줄이는 방법으로 둑을 완성하면서 탄생한 ‘정주영 공법’은 말 그대로 전설이 됐다.

이처럼 뚝심있고 재치가 번뜩이는 사업가로서 뿐만 아니라 체육계에서도 정 명예회장은 한 획을 그었다. 가장 큰 수확은 서울올림픽 유치였다.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았던 당시 불가능하다는 예상을 뒤업고 일본을 비롯한 경쟁국을 모조리 따돌리고 서울을 올림픽 개최도시로 만들었다. 그 시절 현대그룹 임직원 부인들까지 동원해 IOC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일은 ‘역시 정주영’이라는 이미지를 다시 한 번 각인시켰다.

그런 정 명예회장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 도전해 뜨거운 실패를 맛봤고, 사후에는 그가 일생을 받쳐 일군 그룹이 쪼개지기도 했다.
하지만 85세의 나이로 500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군사분계선을 넘으면서 남북교류의 물꼬를 튼 그의 업적은 사업가와 체육인 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한 민간사절로서 정주영이라는 인물을 후대에 까지 환하게 밝히고 있다.

<이충희 기자 @hamlet1007>
hamlet@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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