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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영화>양반도 상놈도 아닌 세 남자 ‘객잔 생존게임’
적진에 남은 패잔병 셋. 그러나 그들의 칼 끝은 적군이 아닌 서로에게 향해 있다.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영화 ‘혈투’는 재능과 신분이 다른 세 남자의 죽음을 앞에 둔 싸움을 그린 영화다. 서로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게 되는데, 그 무대가 언제 발각될지도 모르는 적진 한가운데 은신처다. 이들을 둘러싼 과거의 비밀과 서로의 목숨을 담보로 한 ‘서바이벌 게임’이 이 영화의 열쇠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만주 벌판. 때는 광해군 11년이다. 중국 대륙은 거센 청의 기세가 명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는 무렵이다. 조선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위해 군을 파병해 청과 싸운다. 조선군을 이끌던 군장 헌명(박희순)은 지원병이 오지 않아 결국 패퇴한다. 부장 도영(진구)과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시신이 가득한 빈 객잔으로 몸을 피한다. 두 남자는 그곳에서 미리 도망친 조선 병졸 두수(고창석)를 만난다. 살자고 간 곳에서 정작 그들이 발견한 것은 ‘너를 죽여 마땅한 이유’뿐이다. 어린 시절을 함께하며 우정을 나눈 헌명과 도영은 피비린내 나는 당쟁 속에서 애초부터 어긋날 운명이었다.

이들에겐 ‘상것’ ‘아랫것’일 뿐인 두수는 어떠한가. 언제나 전쟁은 ‘그들만의 것’, 피붙이를 걷어먹이는 것이 유일한 존재 이유인 민초에겐 두 장수가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재수없는 양반’일 뿐이다. 탈영의 책임을 물어 자신을 처벌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영화는 조선군과 청의 병사들이 사투를 벌이는 전장에서 시작해 곧바로 객잔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으로 인물들을 몰아넣고 생존 게임을 벌여간다. 밀폐된 곳에서 세 남자는 신경전을 벌인 끝에 결국 피와 살이 튀는 싸움을 벌이게 되고,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된 적군도 한발 한발 그들을 향해 간다. 


세 남자의 운명엔 출세욕과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남자들의 심리뿐 아니라 당대 사회의 모순들이 그대로 응축돼 있다. 자신의 야심을 위해 은덕마저 배신하는 살벌한 생존법칙이 당대 정쟁과 얽혀 있고, 양반과 상민의 갈등과 충돌도 극의 줄기 중 하나다. 또 하나의 주요한 테마 중 하나는 남을 대리한 전쟁의 맹목성과 허무함이다. 조선은 명을 대리해서 싸우고, 상민은 양반들의 권력다툼에 희생양이 된다. 배경은 조선시대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한 이슈들이 숨어 있다.

여러 가지로 매력적인 설정이고 빼어난 장면과 대목도 여럿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극중 인물의 행동 동기가 갖는 설득력이 약하다. 박희순, 진구, 고창석 등 세 배우의 연기는 제 몫을 다하지만 드라마가 주는 한계를 뛰어넘진 못한다. ‘부당거래’ ‘악마를 보았다’등을 쓴 시나리오 작가 박훈정의 감독 데뷔작이다. 15세 이상 관람가. 24일 개봉.

이형석 기자/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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