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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념에 단죄당한 최초의‘한류무희’부활 춤사위
올해로 탄생 100돌 최 승 희 그녀의 삶과 예술
열여섯살에 日 이시이 바쿠 공연보고 무용수의 길

승무·칼춤·보살춤 등 무대위 예술로 승화

한국 첫 서구식 현대기법 춤 창작·공연

정교함에 신비함 갖춰 유럽 등 세계가 극찬

친일논란 사업중단 속 올 각종 추모공연 등 계획

무용계 “그녀의 업적·예술적 가치 폄하 안된다”



1930년대 한국은 암울했다.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의 현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존재, 그것은 희망이었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다른 한편엔 춤으로 세계를 누빈 최승희(1911~1969)가 있었다.

한국 최초의 현대무용가이자 1920~30년대에 활약했던 ‘모던 걸’인 최승희는 춤으로 세계 무대에 오른 최초의 한류 엔터테이너였다.

한국에서 첫 울음을 터뜨린 최승희는 북한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남북 어디에서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 비운의 인물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그는 친일, 친북 인사였고 북한에서는 숙청의 대상이었다.

올해는 최승희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100년이 흘렀지만 이후 누구도 최승희만큼 춤을 매개로 한국을 알리지는 못했다. 친일 논란으로 엇갈리는 평가 속에 탄생 100주년을 맞은 오늘. 최승희기념사업회가 전시회와 학술심포지엄 등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무용가로서 그의 예술적 가치를 되새겨본다.

▶시대를 앞서 가다=최승희는 승무와 칼춤, 부채춤과 가면춤 등을 무대 위로 올려놓았다. ‘춤은 화류계 여자들이 추는 것’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춤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기방에 숨겨져 있던 한국의 춤은 최승희로 인해 무대를 찾았다.

최승희는 열 여섯살이 되던 해 한국을 찾은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고 무용수로서의 자신의 인생을 결정했다. 이시이 바쿠의 수제자로 들어갔지만 그의 무대는 일본이 전부가 아니었다.

1929년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렸고 한국 전통무용에 눈을 돌렸다. 한국 전통무용 전수자들을 따르며 그들의 무용을 익히고 신무용과 접목시켰다. 일본에서 유학하며 서양무용을 배웠지만 그것은 전통 무용을 현대적으로 표현해내는 기반이 됐다.

그것은 최승희의 춤이 세계 무대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힘이 됐다. 특히 유럽에서 최승희의 춤은 정교함에 신비감이 더해져 인기가 높았다.

1938년 최승희는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두 번째로 큰 극장인 샬르 플레엘에서 유럽 첫 공연을 가졌다. 그때 선보인 작품 ‘초립동’ 덕분에 유행에 민감한 파리에서는 초립동 모자가 유행하기도 했다. ‘초립동’은 일찍 장가 가는 어린 총각이 새각시를 맞는 기쁜 마음과 부끄러움을 표현해낸 작품이다. 


이후 유럽 순회공연을 끝내고 다시 파리로 돌아왔을 때는 최승희의 무대를 보기 위해 피카소, 장 콕도, 로망 롤랑 등 문화예술계 명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프랑스의 ‘피가로’ 지는 최승희에 대해 “선이 환상적인 동양 최고의 무희”라고 극찬했다.

주은래는 최승희의 춤 중 ‘신노심불로’를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최승희의 일본 데뷔 무대를 보고 장편 ‘무희’에서 그녀의 예술세계를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해외에서 최승희를 대표하는 춤으로 평가받은 것은 ‘보살춤’이었다. 여러 지방의 무당춤을 직접 보고 만들어낸 최승희만의 춤사위는 창조적인 의상으로 다시 태어났다.

최승희는 신라장군 황창을 기리는 춤인 ‘검무’ 고려말기 황진이가 고승을 유혹하려 춘 ‘승무’뿐 아니라 ‘아리랑’ ‘화랑의 춤’으로 한국을 표현했다. 이 밖에 신라시대를 배경으로 한 3막 4장의 무용극 ‘반야월성곡’과 영화로 제작된 ‘사도성 이야기’로 동양 발레의 꿈을 춤으로 실현하기도 했다.

▶남과 북, 그리고 친일논란 위에 서다=30년대 후반에만 유럽, 미국, 중남미 등에서 150여회의 공연을 소화할 당시가 무대 위 최승희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식민지의 아픔과 혼란한 정치적 상황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났다. 최승희는 만주와 중국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위문공연에 서야 했다. 관동군이 있는 곳이면 만주와 중국 어디든 가야 했다. 1942년부터 2년간 100회가 넘는 전선 위문공연을 했다. 그것은 최승희의 삶에 오점으로 남았다.

해방 직후 최승희는 사회주의 문학을 하던 남편 안막을 따라 북한을 향했다. 하지만 북한에서 통치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정치범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북을 이유로 국내에서 이름이 잊혀졌고 북한에서는 숙청당했다. 남북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던 그는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며 남북에서 동시에 복권됐지만 ‘친일’로부터는 끝내 자유롭지 못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최승희가 국방헌금을 납부했고 일본군 위문공연을 했다며 친일명단에 포함시켰다.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지난해 광복회 등 보훈단체들은 홍천군청을 방문해 최승희의 고향 홍천군이 추진 중인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선양사업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홍천군은 2008년도에 무용가 최승희 기념사업회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최승희 춤 축제를 개최해왔다. 친일 논란으로 최승희 생가터 복원과 전시관 공연장 건립 등의 계획도 잠정 중단됐다.

그러나 무용계는 최승희가 남긴 업적과 예술적 가치까지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남북한 무용사 비교와 최승희 연구를 해온 한경자 강원대 교수는 “최승희의 춤에는 일본의 군국주의를 찬양하거나 선동한 내용은 없다”며 “당시는 문화예술인들은 총칼 앞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시기로, 공연 수익금은 최승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국방헌금으로 헌납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최승희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동호 위원장도 윤이상, 이응로를 예로 들며 “일제 강점기에서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자면 군 위문공연은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무용으로 평가받아야 함을 강조한 바 있다.

여전한 불씨에도 최승희기념사업회는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략적인 행사의 틀을 잡아놓았다. 최승희기념사업회 측은 “오는 8월부터 10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과 최승희 미공개자료 전시회를 열 계획”이라며 “11월까지 최승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과 워크숍, 추모제와 추모공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설·연극으로 엿본 최승희

“21세기 감각으로 20세기를 산 사람…”


“나는 폭탄과도 같은 위대한 정열을 가졌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끝까지 내가 무대 위에서 고꾸라질 때까지 보여주고 싶습니다.”(최승희 자서전 ‘불꽃’ 中)

열정적인 최승희의 극적인 삶은 그 자체로 다른 작품의 매력적인 소재가 됐다. 국내에서 소설과 연극으로 만들어졌다.

김선우는 2008년 발간한 소설 ‘나는 춤이다’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최승희를 그려냈다. 시인 김선우의 소설 데뷔작으로 그는 “최승희는 너무 일찍 온 사람”이라며 “21세기의 감각으로 20세기를 산 사람”이라고 평했다. 김선우는 소설을 통해 화려함 속에서도 극한의 고독을 맞아야 했던 예술가로서 최승희의 삶을 시적인 문체로 재구성해 감동을 전했다. 

지난 2003년엔 극단 미추가 ‘최승희’란 제목의 연극으로 최승희를 무대로 끌어올렸다. 손진책 연출에 김지일, 배삼식이 극본을 쓴 이 연극에서 최승희 역은 배우 김성녀가 맡아 열연했다. 조석연 작곡에 국수호가 안무를 맡아 음악과 춤으로 들을거리와 볼거리를 만들어냈고, 최승희의 춤과 춤에 얽힌 일화들을 섞어내며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켰다.

지난해 최승희 탄생 100주년 앞두고 석예빈이 낸 ‘난 춤을 춰요’ 앨범을 통해서는 최승희의 음악적 재능도 확인할 수 있다. 최승희는 작곡 활동뿐 아니라 ‘이태리의 정원’ 등을 직접 부르기도 했다. 앨범엔 지난 2004년 3월 추모공연에서 일곱살의 나이로 최승희의 춤을 완벽하게 재현한 석예빈이 ‘이태리의 정원’을 맑은 음색으로 담았다.

윤정현 기자/ hit@heraldcorp.com
<사진제공:무용가최승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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